졸업 후 10년 정도가 지났네요. 그동안 연구소에서 일한 적도 있고, 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하기도 하고 회사에 다니기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한국은 앞으로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아마도 과학기술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회사들을 보면 정말 가능한가 참 우려스럽습니다.
기술 회사가 회사의 핵심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떨어진다는 것부터가 놀랍습니다.
말로만 과학기술을 내세우지만, 정작 그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기술을 보유한 전문가가 없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명예와 비밀 유지를 위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거론할 수 없지만...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여러 회사들이 비슷합니다.
일단 경영진은 전문성 없이 회사를 설립한 후, 전문가를 채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전문가는 임원이 아니라 직원으로 채용됩니다. 그리고 회사 내 발언력이 약합니다.
회사의 핵심 기술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을 단지 시키는 대로 일하기를 바라면서, 회사의 방향성은 비전문가인 경영진이 정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자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게 있을 것입니다.
전문가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고 불가능한 일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면 그건 사기나 마술의 영역이지 과학이 아닙니다.
전문가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연구를 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하면, 너무 느리다고 당장 실적이 필요하다고 경영진이 반대합니다.
그래서 빠르게 결과를 양산하기 위해 비 체계적인 방법을 택하지만, 대체로 좋은 결과가 나오지 못하고, 체계적인 데이터가 쌓이지 못합니다. 데이터는 회사의 중요한 자신이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데이터 사이언스적인 영역에서도 이것은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동일한 수량일지라도 체계적인 전략 하에서 생산된 데이터는 결론을 내는데 활용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데이터는 수량만 많을 뿐 활용가치가 떨어집니다. 하지만 회사의 자산인 데이터를 쌓아간다는 관점으로 연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작 머신러닝 예측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건 QSAR 분석을 위해서건 어떤 결론을 내기 위해서 건 데이터를 새로 생산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연구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가장 느린 길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더 빠른 길이 결코 아닙니다.
보통 회사에서 이런 상황에 대해서 돈과 인력이 부족하고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게 정직한 말이라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선 이상할 정도로 낭비를 많이 합니다. 꼭 해야 할 일은 안 하지만, 이상한 일에 돈을 잘 씁니다. 그리고 다 실패한 후에 (그때까지 망하지 않았다면) 결국은 해야 할 일을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게 정말 "전략"이었던가요? 처음부터 올바른 길은 정해져 있고 답은 정해져 있는데 말이죠.
회사에서 보통 유명한 분을 임원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돈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회사의 핵심 기술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 단지 유명하거나 어느 정도 지위에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과학기술은 매우 세부적이라 같은 카테고리 내에서도 기술이 매우 크게 다릅니다. 예를 들어 신약개발 전문가라고 해도 그 사람이 저 분자 설계의 전문가인지, 단백질 의약품 전문가인지 유전체에 대한 전문가인지 비임상이나 임상시험 과정의 전문가인지는 전혀 다릅니다. 세부 카테고리 내에서도 실험 기술 대한 전문가인지 특정 모달리티의 전문가인지 어떤 질환이나 표적에 대한 전문가인지에 따라 매우 차이가 큽니다.
하지만 회사의 핵심 분야, 기술과 그 임원의 전문성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보통 임원은 간판으로 투자를 받기 위해 유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대체 투자하시는 분이 무엇을 보고 투자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투자 유치는 가능할지라도 회사의 기술을 끌어올리는 데는 별다른 기여가 되지 않습니다.
외부에 대한 의존성이 높은 경우도 많습니다. 직접 기술을 개발하고 회사의 직원들의 역량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학의 교수님들에게 돈을 주고 기술을 외주로 개발합니다. 저도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으니 외주에 대해서 딱히 뭐라고 할 입장은 못됩니다만... 실제 일은 학생들이 하고, 경험이 부족한 학생이 할 경우, 퀄리티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교수님들은 디테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주를 주는 일이 회사의 사이드라면 별 문제없지만, 회사의 핵심 기술이라면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회사 내부 역량이 성장하기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의지 넘치는 내부 직원은 푸대접하고 외부 사람만 우대하는 회사들이 있습니다. 제가 다녔던 회사들은 대체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외부 사람은 회사의 핵심 기술 개발과 비전 설계와 사업 성공에 그렇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 실적과 돈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분야마다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해온 분야들이 한국에서 그리 주력 산업이 아니라서 부실한 것이지, 돈 잘 벌고 있는 사업은 아마도 잘하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바는 R&D 예산이 증가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은 하나의 학문이고, 그 학문에는 사람들의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과학기술의 철학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연구자끼리도 서로 분야가 다르면 다른 분야를 무시하는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자신의 분야만을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자신이 비전문인 영역에 대해서는 이해하려 하지 않고, 중요성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협업이 어렵죠. 오픈이노베이션?... 안됩니다. 서로 존중이 없는데 뭐가 되겠습니까. (외주로 일하는 제가 이런 소리 하는 건 자기모순입니다만...)
대한민국이 연구자를 존중하는 나라인가?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밖에 답할 수 없네요. 하다못해 연구자에 대한 보상을 하기 위해서 직무발명제도를 법적으로 도입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운영되는 회사가 얼마나 될까요. 연구자에게 결정권도, 발언권도, 보상도 현실에선 잘 보장되지 않습니다. 사업과 비전은 경영진이 그리는 것이고, 전문가나 연구자는 단지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제가 경험해 본 회사들의 기본적인 마인드입니다.
저는 연구자들이 그렇게까지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사업과 연구는 별개가 아니며, 둘을 모두 이해해야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연구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고 발언권을 준다면 충분히 더 좋은 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투자자라면, 연구자들의 역량을 보고, 그들에게 동기부여가 제대로 되는지 (사업이 성공할 시 제대로 보상이 지급될지) 그들의 발언이 존중되는지를 보고 회사를 평가하겠습니다. 기술이 핵심인 회사라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특허는 회사에 귀속될지라도, 연구자의 역량이 회사의 핵심 자산입니다.
그러고 보니 공동체는 구성원을 존중해야 한다 라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했던 게 생각나네요.
저는 비단 연구자만이 아니라, 어떤 조직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라도 그 조직의 방향성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은 그럼 연구와 상관 없는 청소하시는 분들 말도 들어야 하냐? 라고 하더군요.
누구라도 의견을 제시한다면, 저는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사례로 치토스 공장에서 청소하시는 분이 새로운 상품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그게 승인되고 후에 부사장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죠. 이 이야기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있긴 하지만, 이야기로서는 그럴듯 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이 조직을 자랑스러워하고 헌신하기 위해서라면 그 조직은 그 사람을 구성원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그는 조직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투자한 것입니다. 내 직무가 아니라서 나는 우리 회사가 뭐하는 회사인지 관심 없어요. 라고 말하는 회사보다, 자기 직무가 아닐지라도 자기가 다니는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자랑스러워하는 직원이 있는 회사가 좋은 회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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