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한국에서 전문가에 대한 인식

Novelism 2021. 12. 24. 15:28

 

 제가 전문가라고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 말하긴 어려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남들보다 한 분야에 대해서 좀 더 오래 공부하고 연구를 해온 사람입니다. 

 그냥 상대적인 거죠. 제가 정말 진리를 알정도로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항상 옳은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주변 사람들 중에선 가장 그 일에 대해서 오래 공부하고 고민하고 종사해왔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어떤 취급을 당하냐면요. 전문가로서 그 일에 대해 옳다, 그르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의견을 제시하면 그 분야의 비 전문가에게 묵살당합니다. 그래서 항의를 하면 뭐라고 하냐면, 저 사람이 너보다 위고, 저 사람에게 결정권이 있다. 네 말을 안 들어준다고 뭐라 하는 건 네가 잘못한 거다.라고 합니다. 

저는 전문가로서 제 인생 경력을 전부 걸고 어떠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인데, 그게 그냥 떼쓰는 걸로 보이나 봅니다. 

 심지어 제가 A라는 용도를 위해 물건을 만들고, B라는 용도로는 쓰기 어렵다는 분석을 해놔도, 그것을 A와 B의 차이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A가 아닌 B라는 용도로 쓰겠다는 결정을 내려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게 단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주변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들입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럴 거면 대체 왜 학위가 필요하고 박사 뭐하려고 했던 거고 그 후로 몇 년간 왜 연구를 했을까요. 

 한 분야를 깊이 파도 그 의견의 무게가 고작 비전문가에게 묵살당할 정도인데, 그럴 거면 내가 뭐하려고 이런 걸 했는지 자괴감이 듭니다. 

 

 내가 당연히 모르는 것 많고, 서로 다른 분야에선 저 사람이 전문가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적어도 그럴 때는 저보다 나이가 많건 적건, 직위가 높건 낮건, 경력이 길건 짧건 학위가 뭐 건간에 상대가 나보다 잘 아는 분야라면, 그 사람을 전문가로서 존중하고 대우합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전문가인 분야에선, 남들보다 훨씬 고집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그에 대해선 내가 철저하게 노력하고 내 말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대체 누가 알아주고 누가 인정해줍니까? 내 한마디 말에 담긴 무게는 내 지금까지의 연구 경력과 연구자로서의 삶이 걸려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말의 무게를 그냥 단지 한 사람의 의견 정도로 치부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보다 유능한 사람 위에서 일하게 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항상 변하기에 누구든 나이를 먹고, 보통은 경력에 따라 직위가 오르고,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더 열심히 공부해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워온 날이 오니까요. 그럴 때 단지 직위가 높다는 이유로 자신보다 전문성이 높은 사람의 조언을 부정할 권한이 대체 누구에게 있다는 것입니까? 

 

 저희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교장을 하셨는데, 그때 이야기 중에서도 항상 자부하시는 게, 자신이 직원들이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게 최대한 도와주었다고 하십니다. 교장은 직원 들위 위에서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직원들과 아이들이 주인공이고, 자신은 그를 위해 도움을 주는 존재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직원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한다면, 그 일이 납득할만하면, 그 사람을 그 일의 전문가로 인정하고 모든 권한을 주고, 대신 권한을 위임한 자신이 책임진다면 그 사람은 분명 기쁘게 일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지나온 직장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았습니다. 연구라는 업무 자체가 매우 협소해서 조금만 자기 분야에서 벗어나면 잘 모르는 일 투성이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보다 전문가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르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야 할 길은 이미 명백합니다. 연구자가 좀 더 존중받으면서 연구를 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흥미만을 위한 연구까지 지원하는 여유는 없으니까, 실용적인 연구 위주이겠지만...) 없다면 그런 건 없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직장을 옮겼지만, 여전히 제가 처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게 저의 운명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