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s and Informatics

상보성 원리: 대립적인 것은 상호 보완적이다.

Novelism 2023. 8. 25. 23:01

 

 요즘 세상이 너무 날카로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화합과 존중과 평화의 시대는 끝났고 대립, 미움, 분노, 증오, 좌절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화합을 바라는 마음으로 대립의 시대에 살던 한 과학자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contraria sunt complementa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가문 문장에 적힌 글입니다. 

 대립적인 것은 상호 보완적이다. 

 

 물리학자들은 세상의 원리를 발견하기를 희망합니다. 좀 심하게 나가면, 그 원리로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거나, 모든 분야에 그 원리를 응용하려는 생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닐스 보어는 아마도 상보성 원리가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리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동의합니다. 

 

 양자역학에서 상보성 원리는, 양자역학의 수학적인 체계가 어느 정도 완성된 후, 이 수학체계에서 고전역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양자적인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닐스보어가 도입하였습니다. 

 물질의 입자-파동 이중성에 대하여 하나의 사건을 두 가지 다른 관찰방식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두 관찰방식은 상호 대립이지만 상호 보완적이기도 합니다. 

 

여기 설명은 지루할 것 같고... 그냥 * 표까지 쭈욱... 넘기셔도 됩니다. 

 

  입자란 물질이 공간상에서 한 점에 집약되어 있다는 표상이고, 파동은 공간상에 퍼져있지만, 특정 파장을 가지고 있다는 표상입니다. (파동의 파장이 λ 일 때, 운동량 p = h/λ입니다.) 

 고전역학적으로 물질이 입자인가 파동인가라는 것은 둘 중 하나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빛이 입자인가 파동인가에 대해서 상반된 실험 결과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전까지 입자라 생각했던 많은 질량을 가진 알갱이 같은 물질들 또한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닐스 보어의 해석에서 입자와 물질이라는 표상은 객체의 본연의 모습이 아닌 측정방식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표상이라는 것이 것입니다. 뭐 이 본연의 라는 표현 자체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여기서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에서의 인식론적 차이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측정한 세상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이 실제 세상과 동일한 것인가? 

여기서 어떠한 차이점이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입자와 파동이 본래 그러한 것이라면, 하나의 객체가 입자이면서 파동일 순 없습니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합니다. 모순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는 방패라는 의미로, 

 당연히 그 둘이 시공간적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동시가 아니면 됩니다.) 

 닐스 보어는 이 모순에 대해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 상호작용을 통한 측정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우리가 입자로 보고 측정하려 하면 입자로 보이지만, 파동으로 보고 측정하려 하면 파동으로 보입니다. 

당시 닐스보어와 공동연구 중이던 하이젠베르크도 아인슈타인의 "우리가 무엇을 볼지 결정하는 것은 이론입니다."라는 말로부터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Δx Δp >= h/4π인데, 어떤 측정에서 위치의 불확정성과 운동량의 불확정성을 곱한 것이 특정 값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즉,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려 한다면,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커지고, 반대로 운동량을 정확히 측정하려 한다면, 위치의 불확정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이 둘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입자의 표상은  Δx 가 작고  Δp가 큰 경우, 그리고 파동의 표상은  Δp가 작고  Δx 가 큰 경우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에 따라서 입자로서도, 파동으로서도 보일 수 있습니다. 

(코펜하겐에서 둘이 같이 연구하다 이 해석에 대한 문제로 둘 다 지치게 되고 닐스보어는 스키여행을 가서 상보성 원리를 발견하고, 하이젠베르크는 남아서 자정까지 연구하다 아인슈타인의 말로부터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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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닐스 보어의 상보성은 이렇게 서로 대립하는 표상이 서로 상보적이기에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선 두 표상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말을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색안경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맞는 상황입니다. 관점이 없다면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의 관점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나의 관점은 하나의 편견입니다. 그러니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눈에는 하나의 색만을 볼 수 있는 시각 세포들이 여러 개 존재하기에 다양한 색을 볼 수 있는 것이죠.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어떠한 관점 (색안경, 표상...)에 의해서 측정된, 그리고 해석된 세계입니다. 

 

 유명한 예시로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코끼리의 코를 만지고, 다른 사람은 귀를 만지고, 또 다른 사람은 다리를, 또다른 사람은 꼬리를 만졌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하나의 전체를 본 것이 아닌, 부분만을 보았기에 서로 모순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 제목이 부분과 전체 입니다. 그 제목에는 참 많은 의미가 있는 것 같지만...  그러고 보니 닐스 보어 문장에도 코끼리가 있군요... 

(이것이 위대한 연관성인가? )

 

객관적이라는 말도 주관이 아닌 다른 사람의 관점이라는 말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이라는 의미를 내 표하고 있죠. 객관은 다양한 주관이 모여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인간의 성격이라는 것도 내재된 것이 아니라 외부와 어떤 상호작용을 하여 측정된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에 상보성 원리를 도입한 이후에도 이 상보성 원리에 깊이 빠져든 모양입니다. 

 그는 상보성 원리가 동양 철학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상보성을 의미하는 표상이 태극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문장에도 태극 문양을 넣었습니다. 한국도 태극 문양을 나라의 국기로 사용하는 나라인데... 닐스보어가 한국을 알았는지 궁금하네요. 

 

상보성- 불확정성의 원리는 상당히 강력합니다. 위치-운동량뿐만 아니라, 시간-에너지에도 불확정성이 작용합니다.

 불확정성의 원리 관계에 있는 변수들을 상보변수라 부릅니다. 에너지 보존 법칙보다도 더 우선순위가 높습니다. 매우 짧은 시간 동안이라면, 에너지가 보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찰나의 순간 갑자기 입자들이 생겼다가 사라져도 별로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그런 것들이 거시 세계에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양자 세계에선 이런 상황이 허용되어야 설명가능한 현상도 있습니다. 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과, 추구하는 가치에서도 상보성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분야에서의 상보성은 물리학에서의 상보성과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성장과 분배라는 것도 대립되는 요소로서 인식되는데, 성장이나 분배 중 한쪽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할 경우 오히려 문제가 발생하여 추구하던 것도 얻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는 딱히 그런 관계까진 아니었죠. 

 음... 한때 중농주의와 중상주의가 있었는데 이것도 상보성으로 생각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농업은 1차 산업으로 분류되지만, 많은 산업에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농업에만 투자한다고 생산량이 늘어나기 어렵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농업 생산량의 증가에 관련된 다른 산업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업의 발전은 탐험과 무역을 통한 신규 작물과 비료의 도입으로 농업 생산량을 향상할 수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농기구를 향상해 생산량 증가에 기여합니다.

 그리고 저장과 운반 기술이 없다면 아무리 생산량이 증가하여도 제대로 활용될 수 없습니다. 

 

 하이젠베르크와 폴 디랙은 미국에서 돌아오는 여행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하며 위대한 연관성에 대해서 서로의 견해차이를 확인했는데, 폴 디랙은 사람은 결국 한 번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고, 하이젠베르크는 사람들은 결코 한 가지 어려움만을 해결하고 있을 수 없으며 항상 많은 고난을 한꺼번에 해결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폴 디랙은 위대한 연관성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사후적인 사족이라 여기는 입장이고 당면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것만이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다른 문제도 함께 해결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의 문제를 해결했을 때 다른 어러움 들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너무 복잡해서 그냥 단순해지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하나의 관점으로 좋은 놈, 나쁜 놈으로 이분법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아와 피아의 투쟁이긴 하죠.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편견 없이 인간은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이라는 게 좋게 보면 한없이 좋게 보이고, 나쁘게 보면 한없이 나쁘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거나 저거나 결국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저는 현대 과학을 공부하면서 동양 사상에 유사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연철학의 출발점은 세상의 변화는 어떠한 원리에 의해 일어난다라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병의 원인은 마귀의 장난이 아니라 어떤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고, 그것을 인간이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은 생각보다 더 놀라운 주장입니다. 던져진 물체가 어떤 운동을 하는지 물리학이 제대로 발전하기 전엔 완전히 엉뚱한 추측을 하던 시대도 있습니다. 물체의 운동이나 생명 현상이 어떤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신에서 인간 중심으로 사고 체계가 변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실험- 측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탄생한 후의 현대 과학에선 이것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시공간마저 절대적이 아니라 관찰자마다 상대적이며 , 측정이라는 행위가 현상을 교란할 수 있고, 그것을 0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측정에 의해서 교란된 세계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학적인 관점은 사회 전반에 대한 관점도 바꿀 수 있습니다. 

 행위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긴 하겠지만, 딱히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세상의 옳고 그름은 이야기하지 않고, 그건 정해진 룰일 뿐이고, 자신은 거기에 맞춰서 이익이 되는 행위를 선택한다.라는 관점을 가진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세상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겠다.라는 관점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라는 말도 있죠. 

 제가 느끼기에 유가나 도가 같은 사상은 후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변화시키는 것이 올바르냐 아니냐를 떠나서.. 내 행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는 생각이 내포된 것 같습니다. 현대과학의 체계에서 동양 사상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금강경에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상계의 모든 일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은 것이고, 이슬 같고 번개 같은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보라는 게 어떻게 보라는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때때로 하나의 말은 둘 이상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실체가 있는가, 본질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비록 우리가 측정한 것이 본질은 아닐 수도 있으나 실제가 없다면 측정 또한 불가능하다.라고 저는 대답합니다. 

 

 닐스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스키여행을 가서 뻥카 카드놀이 하다가, 분위기가 고조되며 카드 없는 카드게임을 시도하였을 때 전혀 게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짱구입니까?.. 술래 없는 술래잡기도 아니고...)

. 뭐 사기를 치려고 해도 가짜 물건이라도 있어야 사기를 치지 아무것도 없으면 사기도 안쳐지죠. 

 

 세상은 인간이 본 것이라는 생각에 깊이 빠지면 측정된 세계와 실체 세계가 다르다 보니 세상의 실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결국 저는 실체가 있어야 측정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