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학문적 배경은 기초과학에 가깝습니다.
저는 물리학을 전공했고, 세부 전공도 이론물리학, 그중에서도 계산과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연구였습니다.
박사후연구원 시기부터는 조금 다른 연구를 했습니다. 보다 응용적인 연구, 혹은 기술적인 분야를 연구했습니다. 단백질 구조 예측, 인공지능을 이용한 다양한 예측 모델, 약물 디자인 등이 그 예입니다.
다만 연구 주제가 기술적이었더라도, 저는 항상 원리를 탐구하는 접근을 추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개발한 단백질 도메인 경계 예측 방법론은 “단백질의 도메인은 진화의 단위다”라는 원리에서 출발했습니다. 원리와 기술은 합리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제가 학계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보통 자연과학자들은 공학에 대해 이런 지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공학은 거시적인 측정 결과로부터 원하는 물성을 개선하는 데에는 능하지만, 미시적인 메커니즘 자체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 물론 공학에서도 미시적 측정 장비와 분석 방법을 사용하지만, 자연과학자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이런 아쉬움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묻는다면, 메커니즘을 이해한다고 해서 원하는 물성을 가진 물질을 더 효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쉽게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제대로 된 메커니즘 스터디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을 명확히 증명하는 일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메커니즘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도, 실험적 최적화만으로 충분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시뮬레이션 기술과 데이터 분석 기술을 활용하여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약과 소재를 설계하는 사업을 해보려 합니다. 왜 저는 이런 선택을 하였을까요?
저는 이 선택이 제 정체성의 특수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자연과학과 공학, 그 사이에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제가 말하는 메커니즘 스터디는 자연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메커니즘 스터디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제 연구의 목적은 메커니즘을 최종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메커니즘을 가이드로 삼아 물질을 “설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떤 프로젝트에서 실험 및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나의 메커니즘 가설을 세웠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가설에 따라 설계 방향을 제시하여 원하는 물성을 가진 물질을 찾았다면, 저에게 그 가설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증명하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가설이 설계 방향을 좁히고, 더 나은 후보를 찾는 데 실제로 기여했는가입니다.
이것은 기초과학과 공학 사이에 있는 저 나름의 타협안입니다. 아마 기초과학자들은 이런 접근을 그리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설을 수립한다는 점에서는 기초과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그 가설을 검증하는 일보다, 새로운 물질 설계에 활용하는 일을 우선하려 합니다. 뭐 좀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추가로 가설을 제기할 필요 없이, 이미 알려진 메커니즘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연구에 활용하고 분석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실제 현상을 완벽하게 모사한다는 보장이 없더라도 말입니다. 시뮬레이션은 이를테면 논리적인 사고 전개, 혹은 수읽기와 비슷합니다. 구체적인 분석 없이 머릿속에만 남아 있던 생각들이,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됩니다. 무한해 보이고 가치 평가가 어려웠던 선택지들이 추려지고, 결국 평가 가능한 몇 가지 후보가 남습니다.
망양지탄(亡羊之歎)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기망양(多岐亡羊)이라고도 하는데, 달아난 양을 찾으려 했지만 갈림길이 너무 많아 결국 찾지 못하고 탄식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연구자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살면서 이런 일을 자주 경험합니다.
시뮬레이션과 데이터 분석이 항상 정답을 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선택지 앞에서 적어도 적절한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 저는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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