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때 알고 지낸 선배 중 한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 선배는 상당히 비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만의 가치관이 확고하고, 유능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툭하면 "나는 팩트만 말해."라고 자주 하셔서 제가 닥터 팩트라고 부릅니다.
좀 오만하기 때문에 그 선배를 싫어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지만, 말만 좀 저렇게 하지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저는 배울 점이 있어서 같이 다니면서 이것저것 배웠습니다.
치즈 같은 조금 비싼 식재료 고르는 방법에 대한 것들이나 수비드 요리법 같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슬라이스 치즈 같은 거 사려고 하면,
"너 아직도 그런 거 먹니? 그런 건 애들이나 먹는 거야."라고 비싼 치즈를 권하거나,
제가 과자 같은 것을 사 먹으려고 하면 "그건 정크야 먹지 마"라고 했습니다.
덕분에 앵갤 지수가 올랐습니다.
어느 여름, 그 선배와 같이 스터디를 했습니다.
그때 그 선배는 박사과정 4년 차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4년 차면 졸업해야 할 시기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선배가 스터디를 하면서 전혀 집중을 못하고 자꾸 뭔가 하기 싫다는 소리를 하더군요.
평소에 워낙 자신감 넘치고 적극적이고 유능한 분이라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은 과자를 잔뜩 사 오더니 (당시 돈으로 1만 원 정도 같았는데, 지금처럼 물가가 오르기 전이라 적지 않은 양이었습니다.) 자꾸 과자가 먹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평소엔 저에게 정크푸드 먹지 말라던 분이...
그러더니 저녁식사를 하러 가서 의미심장한 소리를 하셨습니다.
"너는 살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뭐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던 길 갈 수밖에 없지 않냐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면 바로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로 스터디를 더 진행하진 않았고, 당분간 못 만났는데 후에 소속되어있던 연구실에서 나가서 다른 연구실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굳이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고 좀 놀랐습니다.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후로도 제가 졸업할 때까진 가끔 놀러 가서 만나긴 했지만 이유에 대해 자세히 듣진 못했습니다.
지도교수와의 문제인지, 아니면 연구 분야가 안 맞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장래에 대한 비전이 문제였는지...
제가 졸업하고 학교를 떠나면서 거의 만나진 못했지만, 좋은 논문을 쓰고 졸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로 뭘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비트코인 처음 나오던 시절에 채굴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확실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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