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이 아니라 자주... 아니... 거의 항상 자괴감을 느낍니다.
제 연구주제는 신약개발 연구자의 연구를 도와주기 위한 툴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신약개발 연구자들의 연구방법을 이해하고, 그 방법을 컴퓨터로 구현하여 연구자를 돕는 것이 제 연구 목표입니다.
약물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론과, 실험 이전에 판단하기 위한 기준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공부하고 컴퓨터로 구현하고 자동화하여 연구자의 판단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개발한 것들을 신약개발 연구자에게 보여주고, 그 판단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아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제가 개발한 것에 대해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들이 대부 부분이고, 그마저도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이 있을 때는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기회를 망쳐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럼 대체 제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까?
저는 제가 만든 것이 그리 좋은 건 아니라도 쓰레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별한 약물 후보물질 11개를 구매하고 실험을 해서 그중 5개 정도는 kinase assay에서 유효하고, 3개는 cell 실험에서 유효하다고 나왔으니까 아마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중 하나는 컴퓨터로 찾은 게 아니라, 손으로 디자인했지만...) 사실 그것도 제대로 한 게 아니라, 테스트 단계에서 진행한 파일럿 스터디였는데 어쩌다 보니 소통이 잘못돼서 그것을 구매해버렸네요. 정작 본 연구는 퇴사하면서 제 손을 떠나가버렸지만... (사실 이미 한참 전에 2차선 별 결과를 보내 뒀는데...)
그 실험까지 가려고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선별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실제로 일한 기간은 한 2주일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에 투입된 인력은 저 한 명뿐이지만, 어려울 것 없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정작 어려운 게 뭐냐면, 실제로 분자를 구매하고 실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선별한 물질을 믿지 못하겠다고 방치해버렸던 것이죠. 1달 동안이나 실험을 담당하는 공동연구자에게 제가 선별한 물질을 전달도 안 하고 방치만 하더군요. 제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1달째 되는 날에 회사 대표한테 땅에 머리 박고 빌 테니까 제발 좀 실험 좀 해달라고 해서 겨우 실험까지 갔습니다. 물질 구매하고 실험하는데 또 4달이나 걸렸습니다. 그동안에도 계속 저에게 실험해서 결과 안 나오면 어쩔 거냐고 계속 계획 작성하라고 하던데.. 저는 hit ratio 50%가 나올 것이라고 했지만, 믿지 않더군요. 아무튼 계획서를 4번이나 작성해서 줬지만 계속 같은 질문을 반복하더군요. 저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퇴사 선언을 했고, 다행히 퇴사하기 직전에 실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애석하게도 50%에 못 미쳤네요.
제가 뭐가 그리 못나서 그렇게 사정까지 해가면서 일해야 하는 걸까요.
사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제 연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그런 거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것을 아무 대가도 없이 다 주겠다고 합니다만... 그런 거 대부분 관심도 없고 들을 생각도 없고, 기회를 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럴 거면 저는 왜 연구를 한 것일까요. 연구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사용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쓸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연구자로서의 제 삶은 무의미합니다.
유일하게 제가 세상에 항의하는 수단은 이 블로그뿐이네요.
저는 이런 어설픈 방법이 아니라, 완벽한 기술을 원합니다. 약물의 작용에는 원리가 있고, 그 원리를 파악한다면 아마도 좋은 약물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저는 아직도 미숙하고,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첫 직장이었던 연구소를 떠난 후에 알게 된 건, 아무도 제 연구에 관심도 없고 도와주지 않고, 제가 하려는 연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식이 필요하면 공부하고 기술이 필요하면 스스로 개발해야만 했습니다. "연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연구 환경이란, 서로 배우고 도와줄 수 있는 좋은 동료가 있는 곳이다."라고 말하면서 첫 직장을 떠났지만... 저는 그 후로 그 정도로 좋은 동료와 함께 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늘 혼자였습니다.
그 후로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워온 것인지 저는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좋은 동료들이 모인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서 싸워왔다 생각했지만, 결국 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연구자의 길이란 힘든 삶이며, 길고 힘든 싸움입니다. 문제와 싸우는 것이 아닌, 세상의 편견과 냉소와의 싸움입니다.
세상의 많은 위인들이, 전폭적 지원을 받아가며 위업을 이룬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비아냥을 듣고 방해를 받아가면서도 자신이 믿는 일을 이루어온 것일 것입니다.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었을 때는, 그 주인공은 이미 위인이라는 관점에서 글이 써졌기에, 소수의 악역 이외엔 다들 그의 편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몇 편의 저서 전을 읽고, 위인은 그가 살았던 당시에는 전혀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훌륭한 분들조차 쉽지 않은 삶을 살았는데, 고작 일개 연구자인 제가 불평해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위인들을 존경합니다. 그분들이 이룬 업적 때문이 아니라, 많은 장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기 때문입니다. 위인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길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 배워왔습니다. 푸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아무도 들을 생각이 없고, 관심조차 없으니까요. 되지 않을 일은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세상은 승자만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업적만을 기억할 뿐, 그들의 마음... 꿈, 기쁨, 희망, 열정, 의지, 노고는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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